기억이 닿는 한 저는 늘 스스로를 지구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이 자기 행성 위를 자유롭게 다닐 수 없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우리 모두가 하나의 행성에 사는 이웃이라고 믿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저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아픔을 느끼게 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금 어린 시절의 제 사진을 보면, 그 소년을 구해 앞으로 닥칠 상처와 부당함으로부터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듭니다.
여러분 앞에 한 어린 소년이 있습니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혹독한 북극에서 겨울에 태어났고, 운명에 따라 러시아 제국의 현대 식민지에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는 코리아에서 온 서류 없는 이주민의 후손이자, 스스로를 자연의 아이들이라 부르는 북극 원주민 가운데 한 민족의 후손입니다. 이 소년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까지 무엇을 겪어야 할지 아직 모릅니다. 지금 그는 희망과 신뢰와 사랑을 가득 품은 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잃어버리게 될 것들을…
기억이 닿는 한 저는 마이크를 손에 들고 무대에 서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부른 노래는 러시아어 노래였는데, 제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래된 러시아 선전 만화영화 「체부라시카」에 나오는 노래였죠. 만화에 담긴 공산주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노래 자체는 조금 슬프기는 해도 아이처럼 매우 순수하고 밝다는 것을 말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제 첫 언어는 사하어였기 때문에 가사의 뜻은 이해하지 못했고, 만화의 그림에서 읽어 낸 의미만 알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태어난 작은 북극 도시 뉴르바에서 술리아 마을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녹음기를 보았습니다. 사촌 형이 멋진 휴대용 녹음기를 가져와서 모두를 녹음하고 있었죠. 제가 기껏해야 서너 살이었을 겁니다. 가족들이 그 기계 옆에서 노래를 불러 보라고 했고, 저는 그것이 녹음되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사실에 무척 긴장했죠. 노래를 부르자 형이 녹음을 틀어 주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 노래를 밖에서 들었고,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녹음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한 단어가 우스꽝스럽게 들렸던 것이죠. 저도 모르는 사이에 ‘п’ 소리를 ‘б’로 바꿔 발음했던 겁니다. 가족들은 웃었지만, 그 일로 저는 제 목소리와 발음을 깊이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는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는 걸 모르니, 몸이 움츠러들고 그 기억을 간직합니다. 나중에 그것은 마음껏 목소리를 내어 노래하기를 부끄러워한 오랜 세월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면 물론 그 녹음을 사랑스럽게 들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녹음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인생 첫 녹음 이후로 저는 늘 다시 녹음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실수 하나 없이, 아무도 저를 비웃을 수 없게요. 텔레비전에서 마이크를 든 가수들을 보며, 언젠가 저도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안전하지 않고 무서운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자기 집이 없던 어머니는 남의 집에서 개인적인 삶을 꾸리려 애쓰셨고, 언제든 술에 취한 어른 친척들이 나타나 우리 모두를 위협할 수 있는 곳이었죠. 아버지가 찾아와 창문과 문을 부수고, 제 눈앞에서 어머니를 때리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끔찍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린 아얄은 이 모든 것이 잘못됐다고, 사람을 위협하거나 때리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믿으려 애썼습니다. 규칙과 법이 있다면 모두가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집에 아무도 없을 때면 줄넘기 손잡이를 마이크처럼 들고 노래하는 흉내를 내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이 꿈은 비밀로 간직하려고 했습니다. 어른들과 다른 아이들의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분명 제 바람을 남자아이에게는 너무 여자아이 같다고 여겼을 테니까요. 어릴 때 어른들은 이미 저를 여자아이로 착각하곤 했고, 저는 아무도 자극하지 않았는데도 그 일로 꾸중을 들었습니다. 사실 제 친구들은 늘 여자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 내내 저를 이해하고 지지해 주었고, 지금도 제게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여성들입니다. 일부러 남자아이들을 피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까운 친구는 여자아이들뿐이었습니다. 물론 겨울의 영하 47도든 초여름의 영상 32도든 어떤 날씨에도 함께 학교에 걸어가던 이웃 친구 두 명이 있기는 했지만요.
저는 가수가 되는 꿈을 소중히 품기 시작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제가 어떻게 보일지, 그곳에서 제 목소리가 어떻게 울릴지 세세하게 상상했죠. 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LP판에 담긴 아주 오래된 러시아어 노래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식민 정책이 보입니다. 아이는 북극 원주민의 모어로 된 노래도, 세계의 다른 언어로 된 노래도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릴 때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요. 집에 있던 음반은 전부 들었습니다. 그때에도 노래들은 무척 단순하게 느껴졌지만, 러시아 동화 녹음을 듣는 것은 좋아했습니다. 물론 거기서도 선전이 의미와 거의 모든 단어를 통제했지만요. 조금 더 자라서는 국영 방송에 나오던 당시의 ‘현대적인’ 가수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선택의 폭은 좁았고, 저는 러시아 대중가수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살던 작은 북극 도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왔고, 그것들은 물론 식민 권력이 통제했습니다. 사하어 노래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가사가 적힌 노래책은 있었지만 악보는 전혀 없었죠. 사하어 방송은 불편한 시간대에 일주일에 몇 번만 나왔고, 나머지 시간에는 러시아 채널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사하 공화국에는 사하어와 러시아어로 방송하는 국영 채널이 있지만, 물론 그 모두는 지방과 연방 당국의 주문을 받은 선전입니다.
같은 시기에 어머니는 저를 음악학교에 보내셨습니다. 오디션을 보며 노래를 불러 보라고 했죠. 오디션이 끝난 뒤 교장 선생님은 바이올린 반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는데도요. 하지만 집단주의적인 식민지 문화에서, 특히 그 시절에 누가 아이의 말을 듣겠습니까. 저는 우크라이나에서 온, 놀랄 만큼 섬세하고 다정한 선생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자주 저를 칭찬해 주셨고, 그것이 제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일 년 뒤 선생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셨고 바이올린 반은 문을 닫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도 줄이 있잖아”라는 말과 함께 러시아 돔라 반으로 옮겨졌습니다. 젊은 선생님은 친절했지만, 그 악기 소리는 제 귀를 아프게 했습니다. 바이올린을 듣다가 들으니 거칠고 너무 시끄럽게 느껴졌거든요. 거기서 삼 년쯤 배운 것 같습니다. 음악학교를 그만둔 것은 수업이 끝나면 저를 때리려고 기다리던 선배들의 괴롭힘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늘 그들에게서 도망쳤고, 어느 날 그것에 지쳐 버려 어머니께 학교에 전화해서 제가 수학 준비로 무척 바쁘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남자아이에게는 괴롭힘을 당한다고 하소연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열두 살 무렵부터 저는 조명을 달고 가수 대신 장난감을 세운 작은 콘서트 무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비슷한 무렵 영어 노래도 듣기 시작했지만, 댄스곡들이라 그다지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소리는 좋았지만요. 그러다 마침내 머라이어 케리의 My All을 처음 들었습니다. 어린 제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뒤집힌 순간이었죠. 러시아 가수들의 딱딱하고 단순한 노래를 수년간 들어 온 저에게 머라이어 케리의 목소리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렸습니다. 저는 그녀를 도무지 현실적이지 않은 목소리와 멜리스마를 가진 마법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발성 통제는 너무나 매혹적이고 영감을 주어서, 저는 그 노래를 카세트테이프로 하루에 30번, 40번씩 틀었고, 물론 어머니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저에게는 헤드폰도 없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는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주었고, 제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던 세계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나중에야 깨달았죠. 그곳이 제 삶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곳, 아무도 저를 위협할 수 없고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끝없는 자유와 영감의 공간이었다는 것을요. 그녀의 노래는 제 주변의 그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아마 제가 우리 작은 도시에서 그녀의 유일한 팬이었을 겁니다. 제게는 그녀의 노래가 단 한 곡뿐이었고 가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바로 그 노래가 기적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지키도록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사춘기가 되자 저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렸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염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염색약에 심한 알레르기가 생기게 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에 술에 취한 아버지의 방문이 갑자기 멈추었고, 삶은 조금 더 평온해졌습니다. 하지만 반 친구들은 첫사랑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에게,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겼죠. 저에게 연애라는 주제는 아주 깊이 묻혀 있었습니다. 제 성적 지향이 드러날까 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하 사회 같은 단일 문화의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죠. 그곳에서는 늘 과시적인 남성다움이 환영받았습니다. 오리와 동물을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 총과 전통 사냥에 대한 관심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릴 때부터 제게는 너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어서, 주변 사람들은 저에게서 뭔가 잘못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침묵하며 에너지를 창작에 쏟았습니다. 지역 신문 어린이란에 글을 쓰고, 학교에서 리더 역할도 맡았죠. 한국인 할아버지는 이를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지역 기자이자 이름난 원예가였고, 북극에서 처음으로 수박을 기른 사람이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사람들이 제 할아버지가 사하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할 때면 부끄럽고 창피해서 어떻게든 부인하려 했습니다. 사하인이 아닌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열정적인 원예가였고, 정말 가까운 친구는 없으셨습니다. 서류 없는 이주민이었던 부모님이 사하 공화국에 도착한 직후 돌아가시는 바람에 고아가 되셨죠. 두세 살 무렵 다른 가족이 할아버지를 데려갔지만 노예처럼 부렸고, 그래서 할아버지는 열한 살에 그들에게서 도망쳐 나오셨습니다.
학교에서는 그 나이 때 흔히 그렇듯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 이야기를,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런 대화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제 성적 지향이 문제를 일으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반 친구들은 저에게 잘해 주었지만, 그것은 그들이 몰랐기 때문일 뿐이었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저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전교생에게 모욕을 당하던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따돌림당했을 겁니다. 한번은 반 친구 하나(훗날 담배 회사의 매니저가 된 사람)가 반 전체 앞에서 저를 비웃으며, 자기가 보기에 무척 재미있고 저에게 딱 맞는다고 생각한 말을 했습니다. “자기 편 사이에서는 남이고, 남들 사이에서는 자기 편”이라고요. 모두 농담으로 받아들였지만 저에게는 상처였습니다. 제 성별과 성적 지향 때문에 지목당하고 공개적으로 조롱당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에 대한 모든 생각을 더 깊이 숨기고 외면한 채, 공부와 사회 활동에 몰두했습니다.
그 모든 내면의 지옥 한가운데서, 이모가 식민 국가의 수도에서 새 영어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갑자기 가져다 주셨습니다. 저는 날아갈 듯했죠. 진흙과 점토로 범벅이 된, 길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길을 달려서 테이프를 받으러 갔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케이스를 열고 머라이어 케리라는 이름을 찾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름은 거기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던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이름 옆에, 노래 제목과 함께요. When You Believe.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you believe”뿐이었고, 저는 이것이 빛을 믿는 것에 관한 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음부터 사랑에 빠졌습니다. 테이프가 닳을까 봐 걱정하면서도 듣고 또 들었죠. 세상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어찌나 잘 어우러지던지요. 지금도 저는 그 녹음을 음악 산업의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소리와 음악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마음껏 노래하거나 연습하지는 못했지만, 모든 프레이즈와 리프와 런을 따라 했습니다. 감정의 불꽃놀이였죠. 바로 그때 음악과 노래가 나의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완벽한 녹음입니다. 그 무렵 제가 사는 작은 도시에도 인터넷의 첫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제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학교 컴퓨터로 머라이어와 휘트니에 대한 정보를 찾았습니다. 한 페이지가 열리는 데 7분이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오스카(OSCARS) 무대에서 노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무대를 유튜브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몇 년 뒤의 일입니다. 그러다 그래미(GRAMMYS)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러시아 국영 채널 하나가 그래미를 방송하기는 했는데, 아주 늦은 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밤에 텔레비전을 보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에, 저는 거의 매일 미리 그래미 시상식을 보게 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2000년의 그 밤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저는 한밤중에 소리를 아주 작게 줄이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사람들이 축하하고 포옹하고 있었고, 저에게는 다른 행성의 다른 세상처럼 보였습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무대에 오르고, 이어서 모자를 쓴 휘트니 휴스턴이 테이블에 앉아 등장하고, 그다음에는 계단이 있는 두 번째 노래가 이어졌죠. 믿을 수 없는 공연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은 비현실적일 만큼 행복하고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진지해야 하고, 위험을 미리 내다보고, 늘 뒤를 돌아봐야 하던 제 삶과는 정반대였죠. 그때는 길에서 불량배들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흔했거든요. 저는 제 안에서 그런 자유를 찾을 수 없었지만, 음악은 그 자유를 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 뒤 저는 행동에 나섰고, 한 마을에서 편곡을 도와줄 수 있는 유리라는 음악가를 찾았습니다. 저는 I Will Always Love You를 커버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아주 대담한 일이었죠.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바깥 기온이 영하 40도 아래로 떨어진 외딴 마을에서, 저는 그가 전자 키보드를 자유롭게 치며 노래의 코드를 찾아내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마법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반주가 완성되자 저는 집에 돌아와 제 목소리를 부끄러워하며 아주 작게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저를 녹음해 줄 수 있는 음향 엔지니어가 일하던 지역 문화회관에 갔습니다. 제대로 된 마이크로 한 첫 전문 녹음이었죠. 너무 설레고 제게 큰 의미가 있는 일이어서 그 뒤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녹음이 끝난 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래할 때 그런 ‘기교’를 잘 부리긴 하는데 너무 많고, 너는 민족 노래를 불러야 한다, 외국 음악은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물론 속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민족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저에게 자유와 수많은 감정을 주던 노래의 세계만큼 저를 끌어당기지 못했죠. 그 첫 녹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역시 제 초기 녹음 중 하나인 이 녹음을 찾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러시아어 노래(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를 사하어로 한 곡 더 커버하기로 했습니다. 멜로디도 노래도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이었죠. 하지만 우리 민족의 노래에 가까워져 보려고 그 곡을 골랐습니다. 커버를 만들기 위해 다시 외딴 마을의 유리에게 갔습니다. 두 시간 만에 완성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첫발을 떼기로 했습니다. 졸업 파티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로 한 것이죠. 반 친구들 중 누구도 제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도,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파티 전날, 저는 마지막에 노래를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무대의 녹음은 찾지 못했습니다.
학교를 마친 뒤 저는 음악에 인생을 바치고 싶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생각을 지지하지 않으셨죠. 그래서 저는 순순히 물리학과, 공학과, 건축학과에 지원했습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찌됐든 합격했지만 포기하고 대신 심리학과에 지원했고, 수학 덕분에 그곳에도 쉽게 합격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러시아 식민 국가의 중앙부로 이사했습니다. 대학 시절 저는 음악을 거의 그만두었습니다. 학생 콘서트에서 커버곡을 불러 보려는 시도가 한 번 있었지만, 그 무대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북극으로 돌아온 뒤, 저는 다시 음악을 하기로 했습니다. 학생 때 쓴 첫 노래 “Creative Life”를 발표했죠. 제게는 아주 순진하고 연약하게 들립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기대에 여전히 맞추려 애쓰는 제가 들립니다. 이 노래로 지역 대회에 나갔다가 참담하게 떨어졌습니다. 노래 끝부분에는 셰어(CHER)의 “Believe”에서 영감을 받은, 당시 매우 유행하던 효과를 썼습니다.
Creative Life (첫 싱글)
하지만 가수로서 저의 자신감 부족은 아주 강합니다. 하하하. 부끄럽네요. 그 무렵 저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를 자주 들었고, “You And I”라는 노래를 썼습니다. 솔직히요? 듣기가 너무 민망합니다. 노래도 끔찍하고 부른 것도 끔찍하지만,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제게 목소리가 있고 그 목소리가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민망하지만 그래도 나누겠습니다. 이 노래가 불편하고 부끄럽기까지 하지만, 이것도 제 과거의 일부이고 제 일부입니다. 저는 함께 작업한 음악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래의 리듬과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해 주려 했지만, 저는 아무의 말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느끼는 대로 노래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이것이 제 초기 녹음 가운데 남아 있는 첫 번째 녹음입니다.
You And I
초안
노래는 매우 서툴고 솔직히 말해 그냥 별로였지만, 이 노래 덕분에 팝 음악 대회 “뉴 웨이브” 준결승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Unchained Melody” 커버와 함께 보냈습니다.
이 대회에 나가도 될지 조언을 구했을 때, 지역 프로듀서 중 한 사람은 대놓고 말했습니다. 너는 우리 공화국을 대표할 자격이 없으니 가지 말고, 그녀가 가야 한다고요. 그리고 저보다 더 자격 있다는 가수의 이름을 대었죠. 물론 듣기 거북한 말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무대 뒤에서 훨씬 더 많은 해를 끼치게 됩니다. 결국 저는 혼자 지원했고, 지역 예선을 건너뛰고 바로 준결승에 올랐습니다.
결국 저는 제가 어떻게 입고 어떻게 춤춰야 할지 정하는 여성 연출가가 이끄는 팀 전체와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이 연출가는 나중에 제가 공개적인 입장과 권력 비판 때문에 해고된 바로 그 극장의 책임자가 됩니다. 저는 너무 순진하고 사람을 잘 믿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 동의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저를 많이 지지해 주셨고, 제가 갈 수 있도록 제게 말하지 않고 대출까지 받으셨습니다. 그 문화에서는 모든 것이 국가 관료들과 그들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독립적인 후원자나 스폰서는 없고, 미디어에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면 스폰서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규모 있는 행사는 모두 국가 기관의 지원으로 열리고, 사람들의 세금으로 치러지는데도 특정 고위 관료의 개인적인 후원인 것처럼 포장됩니다. 저는 문화청의 한 국가 담당자로부터 대회에서 돌아오면 모든 비용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비러시아계 시민이 전국 대회의 준결승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적인 일이었죠. 나중에야 알았는데, 많은 예술가들이 해마다 지원했지만 지역 예선에조차 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실패였습니다. 우선 저는 큰 무대에서 노래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진짜 모피와 다른 민족적 요소로 꾸민 차림새를 입혔는데, 비건인 저에게는 맞지 않았고 제 스타일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기 일을 잘 안다고 믿었던 전문가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시각적 스타일 또한 메시지를 담는 하나의 언어라는 생각은 못 했죠. 그리고 그 메시지는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낯선 것이었고 제 내면의 본성에 어긋났습니다. 저는 늘 문화나 나라에 상관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보편적인 언어를 믿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사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머라이어 케리의 노래에 그토록 감동하고 영감을 받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차림으로 저는 끔찍한 기분이었지만, 제 감정을 무시했습니다. 아마 어릴 때부터 저 자신을 무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식민 국가의 수도에서 사람들은 저를 동물원의 동물을 보듯 보았습니다. 돌아왔을 때 아무도 비용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국가 담당자는 그저 무심하게 말했죠. “그런데 너는 우승 못 했잖아.”
하지만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노래를 계속 썼고, 그 노래들은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완전히 무료로 곡을 썼고, 네, 그것은 제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체로 제 일에 대해 돈을 요구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쓴 노래
Welcome to Olonkholand
초안
We Are All Together
초안
Land of Happiness
I’m telling you
초안
Time
Follow Dream
이시아크 (북극 사하 민족의 전통 축제)
초안
Young life
초안
I Guess That I Falling Love With You
초안
My Sakha Land
음악을 계속하는 동안 저는 심리학자로, 또 문화회관의 전문 인력으로 일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버턷습니다. 나중에는 공연자를 위한 학교를 열었습니다. 제 제자들 중 몇몇은 지금도 창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먼 거리와 세월에도 불구하고 몇몇과는 지금도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프로젝트를 만들고 콘서트와 저녁 행사를 열었습니다. 암 병원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교도소 부지에 사하의 전통 신앙을 위한 장소를 짓기 위한 자선 콘서트도 열었고, 거대한 불법 쓰레기장을 치우고 그 쓰레기가 인근 호수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환경 프로젝트도 했습니다. 프로젝트로 가득 찬 세월이었죠. 마치 저를 불안하게 하고 연약하고 나약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들로부터 도망치려고 일부러 바쁜 척하던 것처럼요. 그래도 저는 몇 가지 큰 환경 프로젝트를 해냈고, 나중에 그 대가로 노래할 기회와 자유롭게 말할 기회를 잃게 되었습니다.
위기 심리 지원 서비스에서 일할 때 저는 사실상 그 서비스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지원 절차를 새로 짜고, 심리상담사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죠. 공화국 어디서든 무료로 전화할 수 있게도 만들었습니다. 그전에는 북극 공화국의 수도 주민들만 전화할 수 있었거든요. 결국 그곳에서 흔히 그렇듯, 관련 교육도 경험도 없는 다른 러시아인 남성이 공식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저에게는 그저 형식일 뿐이고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 전처럼 모든 일을 계속하라고 했습니다. 부당한 일이었고, 그래서 저는 그저 아무 갈 곳도 없이 떠나기로 했습니다…
영어 커버곡을 라이브로 녹음하도록 도와주고 싶어 하는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목소리를 보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남기자는 생각이었죠. 오늘날 저는 이것을 무척 소중히 여깁니다. 예전에 제가 어떻게 노래했는지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The Trace (라이브 커버 앨범)
그 뒤로 제 목소리와 스타일을 찾는 세월이 이어졌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청중의 마음에 들고 우리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되려고 애썼던 것 같은데, 결국 그것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 노래는 저답지 않지만, 그 시절의 제 모습을 정확히 담고 있습니다. 들이대고, 건방지고, 모두에게 제가 멋지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하던 모습이요. 하하하.
I’m Getting Into Your Life (앨범 “Unusual Art”)
초안
그리고 이 곡은 북극 한 민족의 오래된 노래로, 아주 사랑받는 곡입니다. 저는 무척 긴장해 있었습니다. 장식을 잇따라 넣고 조금 다르게 부르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하지만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이 버전이라고 느꼈습니다. 동료들과 청중은 제가 신성한 노래를 왜곡했다며 이 버전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노래를 처음 부른 마리나 포포바가 노래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며 저를 칭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러시아 식민 국가의 유명한 ‘자유주의’ 정치인 한 명은 그녀에 대해 “뭐, 원숭이가 노래는 예쁘게 부르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무도 그녀를 두둔하거나 그의 말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The Snow Bird (싱글)
원곡과 제 영어 버전
사하 공화국의 초대 전 대통령과 사적으로 나눈 대화에서, 연방 국영 채널에 민족 공화국 출신의 진행자나 공인이 없다고 제가 말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네가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면 연방 무대에 진출하기가 더 쉬웠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러시아인이 아닌 능력 있는 사람은 그곳에 들여보내지 않는다.” 놀랍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분명한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부당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뒤 상실이 찾아왔습니다. 다음 노래는 제 천사였던 사랑하는 이모에게 바치는 노래입니다. 이모는 제 건강을 돌봐 주셨고, 구급차 응급 의사였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비행기 안에서 썼습니다. 종이 한 장을 꺼내 가사를 쓰기 시작했는데, 멜로디는 저절로 떠올랐고 눈물은 멈추지 않고 흘렀습니다. 승객들이 저를 쳐다보며 아마 걱정했을 겁니다. 그렇게 저는 슬픔을 울어서 쏟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나올 무렵, 저는 두 번째로 사랑하던 이모를 잃었습니다. 북극 문화에서는 아이들과 이모의 유대가 매우 중요하고 단단하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이모는 종종 어머니나 할머니만큼 가까운 존재입니다.
The Last Time When I Met you (앨범 “Unusual Art”)
원곡과 버전
소셜 미디어에서 제 존재가 커지고 여러 지역을 다니게 되면서, 저는 우리 사람들이 저를 ‘오묵’, 즉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일을 거듭 겪었습니다. 대학 시절 저는 러시아의 인종차별에, 심지어 인종차별적인 이유로 두들겨 맞는 일에도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인종차별과 비러시아계 시민에 대한 멸시는 정말 흔한 일이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에게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문제입니다. 동시에 대학 시절 저는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는 가까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가게까지 따라온 네오나치들에게 맞고 밖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친구들은 저를 지지해 주고 먹을 것을 사다 주었죠. 하지만 북극으로 돌아와서, 단지 혼혈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거부를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북극 사하 공화국의 국가를 불렀습니다. 아마 제가 이곳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하 공화국 국가
그 시기에 저는 처음으로 한 남자와 연애를 했습니다. 무척 격렬한 세월이었죠. 관계는 꽤 오래 이어졌지만, 저에게는 학대적이고 상처가 되는 관계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경험에 감사합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그 세월 동안 그의 친척들은 거의 제 가족처럼 되었고, 저는 그들과의 연락을 끊은 적이 없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전 애인의 사촌은 자기 아이에게 제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Two Hearts (앨범 “Unusual Art”)
초안
그 연애 시기에 저는 이 노래를 아주 꼼꼼하게 작업했고, 버전도 여러 개였습니다. 도무지 하나를 고를 수가 없었죠. 하지만 결국 골라야 했습니다.
I’m Singing For The Tomorrow (앨범 “Unusual Art”)
버전
이별 후 저는 몇 번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 보려 했지만, 통제와 학대의 첫 징후가 보이자마자 끝냈습니다. 결국 저는 연애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자유롭고 안전하게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남자를 믿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업계 행사와 모임에서 괴롭힘과 폭력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를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몇 년 뒤 제게 돌아왔고, 저는 지금도 그것을 극복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노래를 깊은 외로움을 느끼던 때에 썼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죠. 제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으니까요.
Just Love Me Please (앨범 “Unusual Art”)
초안
어느 여름날 갑자기, 사하 공화국의 한 마을에서 세 살과 네 살의 어린 여자아이 알리나와 아이야나가 실종되었습니다. 저는 뉴스로 그 소식을 접했고, 그중 한 명이 제 조카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그런데 이모가 전화를 걸어 수색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모든 관심을 그 일에 쏟았습니다. 우리는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은 빠르게 모였지만, 일부는 험난한 교통 사정 때문에 현장에 도착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수색 중에 저는 모르는 사람에게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분명히 국가와 연결된 사람이었고, 수색을 도와 달라는 제 게시물을 삭제하라고 집요하게 요구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그런 비상 상황에서 저는 그들의 논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조회수와 댓글이 많았던 제 게시물은 어떻게인지 삭제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도 이미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있었지만, 저는 수색에 몰두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묵던 텐트 캠프에서 누군가 제 텐트 옆에 일본어 책을 한 권 두고 갔습니다. 같은 날 한 공무원이 저를 면담에 불렀고, 평범한 대화인 척하며 그 책을 손에 든 채 일본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도 조카를 찾는 수색이 한창인 타이가 한가운데서,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저는 농담이거나 초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범죄 가능성과 다른 가능성들을 조사하고 확인하는 대신, 체제의 배신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는 데 시간을 쓰고 있었습니다.
소련에서 많은 고려인들이 일본을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썼고, 그로 인해 수천 명의 고려인이 극동에서 중앙아시아 나라들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 여정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 체제가 얼마나 통제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런지, 모든 사람이 국가의 잠재적 배신자로서 돋보기 아래에서 검증받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국 석 달이 넘는 적극적인 수색은 아무 성과도 없었습니다. 헬리콥터, 구조대원, 수사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입니다.
The Angels
원곡과 버전
그 무렵 러시아 식민 국가는 크림반도를 점령했습니다. 저는 이를 단호하게 규탄했고, 이것은 식민 정책이며 크림 병합의 대가는 원주민들까지 치르게 될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실종된 조카의 엄마와 함께 묵었던 숙소에서 일하던 한 여성과 나눈 대화가 기억납니다. 그녀는 몇 시간 만에 모든 호텔과 어린이 캠프, 기숙사가 사복 차림의 젊은 남자들로 가득 찼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러시아 국가가 크림을 점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뉴스를 보며 밤새 당국의 비인간적인 정책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들을 찾는 데 더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떠났던 그 여행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났습니다.
저는 모든 면에서 그저 텅 빈 느낌이었습니다. 무엇을 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다정한 사람들, 가까운 동료와 친구들이 모두 저를 도우려 했습니다. 저는 학교를 닫았습니다. 도저히 계속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저는 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구조대원들에게 장비가 부족하고 훈련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의 근본 문제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크렘린의 식민 정책에서 비롯되며, 그 정책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고 사람들에게서 모든 자원을 훔쳐 가는 지방 관리들을 길러 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들에 대해 제게 글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고용 제도부터 원주민들 사이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재미로 하는 사냥까지, 사회 문제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뭔가 새로운 것을 들여오길 바라며, 저는 식민화된 북극 공화국을 떠나 나라의 동쪽으로, 그리고 식민 제국의 수도로 옮겨 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보컬 코치로 일했고, 노래 교육에서 목소리를 다루는 방법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방법들은 훗날 전국의 교사들이 사용하는 실용적인 발성법이 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저는 음악 아카데미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따금 북극으로 돌아가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고향의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는 몇 분 만에 이 노래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빌류이강을 따라 사는 수천 명의 원주민들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은 환경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Save The Nature (앨범 “Unusual Art”)
원곡
저는 청원을 시작하고 생태학자들과 연락을 취했습니다. 진실을 위한 긴 싸움이 시작되었죠. 우리는 수질 시료를 독립적으로 분석했고, 현지 실험실은 시료를 조작해 즉시 우리의 결과를 반박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저는 광산 회사가 강 오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청원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공화국의 주요 언론이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두어 달이 지나서였고, 그것도 부당함에 찢기듯 괴로웠던 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 도덕적 책임을 요구한 뒤였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국가’ 생태학자들이 나타나, 국가 실험실의 결과를 독자적으로 반박한 것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우리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 이름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대한 국가 지원금을 받은 뒤 조용해졌습니다. 그 전에도 저는 여러 환경 프로젝트를 해왔습니다. 다음은 북극의 오염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동시에 저는 극장 솔로이스트로 공화국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제 자리는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끈질긴 노력과 독재 체제에 대한 제 지식으로, 저는 극장 경영진이 제 자리를 마련하도록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저는 갔지만, 형식상 그들이 마련한 자리는 언제든 빼앗길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출산 휴가 중인 다른 가수의 자리였기 때문이죠. 저는 그것으로도 대체로 괜찮았습니다. 그저 오래된 야쿠트 노래들로 몇 가지 프로젝트를 하고 싶었고, 그곳에서는 그중 단 하나만 해낼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기사를 쓰고, 체제의 부당함을 겪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실었습니다. 불편한 진실 때문에 많은 미움을 받았지만, 그래도 계속했습니다.
앨범 “The Spring”
My Dear
A Person's Motherland
Love
Childhood
The Stars
The Flower in the Morning
My Dream At The Night
The Snow Bird
제 모든 시도는 가로막혔고, 노골적인 따돌림이 있었습니다. 저는 누구와도 갈등이 없었는데도,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저에게 등을 돌리고 저를 ‘혁명가’라고 불렀습니다. 정작 그들 자신도 왜 저를 말썽꾼으로 보는지 설명하지 못했죠. 그때 저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었고, 그저 제 첫 번째 언어로 노래할 기회를 지키려고 애쓸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크리스마스 직전에 전화로 저를 해고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출산 휴가 중이던 솔로이스트가 복직하겠다는 서류를 내긴 했지만 실제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극장에서 저는 여러 번 도발을 당했습니다. 저에게 소리를 지르고, 콘서트 전 리허설 중에 스피커를 치워 버리고, 악기를 연주하지 못하게 했으며, 저는 모든 것을 서면으로 요청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를 통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당국이 싫어하는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하고, 비판적인 생각으로 사회를 동요시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죠. 하지만 저는 계속 썼고, 많이 썼으며, 젊은 연주자들에 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뒤 그 독립 포털은 폐쇄되었고, 2022년 러시아 식민 국가에서 통과된 검열법 때문에 모든 자료가 사이트에서 삭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저는 무너졌습니다. 한동안은 여전히 북극에 머물려 했고, 다시 스튜디오를 열었습니다. 한 독립적인 러시아인 사업가가 저를 많이 도와주었는데, 사실상 비영리 가격으로 스튜디오를 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사회 문제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고, 모든 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기에 서로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저는 여러 번 배신당했고, 가장 아팠던 것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배신이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평화와 선행을 위한 자선 행사에 초대한다며 저를 속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역겨운 선전 행사였습니다. 마치 함정을 짐작한 듯, 저는 어떤 행사인지 여러 번 물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녀를 믿고 수락했고 갔습니다. 그녀는 그저 제 신뢰를 이용한 것이었죠. 사적인 대화에서 그녀는 항상 정부가 싫고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속임수거나 그저 어리석음이었습니다. 거의 곧바로, 함께 스튜디오를 열었던 또 다른 친구이자 동료가 자기 쓰레기를 치워 달라는 제 부탁 때문에 떠났습니다. 사소한, 평범한 일이었죠. 하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떠났고, 저는 집주인에 대한 금전적 의무를 혼자 떠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저와 엮이려 하지 않았죠. 방송국 관계자들은 제 이름이 윗선에서 승인되지 않아 저를 방송에 초대할 수 없다고 대놓고 말했습니다. 부당함으로 속이 타들어가던 저는, 나라를 떠난 뒤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분노에 찬 글들을 연이어 올리게 됩니다. 누가 저를 박해했는지, 누가 모두를 속이며 도덕적 이상형의 이미지를 만들었는지, 누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저를 모욕하고 짓밟았는지에 대해서요.
다음은 폭력 피해자들에 관한 사실입니다. 민감하신 분은 다음 단락을 건너뛰셔도 됩니다.
지역의 유명한 공인들(예술가, 연예인, 정치인)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저에게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저는 제 인스타그램에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연예계의 유명한 인물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신체적 상해를 입은 두 피해자였는데, 한 명은 장애를 얻었고 다른 한 명은 지금도 신체적 증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여전히 그 사람의 행사에 가며 가해자를 지지한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언론은 이를 무시했고, 아무런 반향도, 수사도 없었습니다. 여섯 살 때 유명한 사하 음악가에게 성폭력을 당한 한 여성의 글도 언론은 무시했고, 아무도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치료를 받을 용기를 냈습니다. 지금 그녀는 그저 치료를 받고 있을 뿐, 정의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에 집에서 가족과 함께 있는 영상을 저에게 보냈는데, 그때 텔레비전에서는 그녀의 가해자가 노래하고 있었고, 가족 중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녀는 조용히 앉아 저에게 자신의 절망을 털어놓았습니다. 도울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부모에게 박해받던 LGBT 청년이었습니다. 부모는 가문을 부끄럽게 하지 못하도록 이미 성인이 된 그를 시골의 한 집에 가둬 두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운명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사라지고,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저는 완전한 통제와 권력자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이 있는 이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막는 무언가가 일어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뚫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들과 강간범들은 우상이 되고, 폭력 피해자들은 공격적인 피해자 비난을 겪으며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강간범들은 기립 박수와 명성과 존경을 얻습니다.
저는 절망에서 비롯된 깊은 분노가 뒤섞인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Unusual Art (앨범)
Black&White
하지만 아무도 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교훈을 얻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저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훗날 저는 오랫동안 힘겨운 내면 작업을 거쳐 그것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내려놓게 됩니다.
Always Move Forward
내 평온을 방해하지 마세요.
저에게는 출구가 없었습니다. 번아웃 때문에, 부드럽고 목소리에 무리가 없는 노래 교육법을 만들었던 보컬 코칭으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음악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르프 마을에서 보컬 전문가를 구한다는 광고를 발견했습니다. 훗날 야권 지도자 나발니가 감옥에서 숨지게 되는 바로 그 마을입니다. 그는 크림 병합을 지지했고, 비러시아인들을 모욕했으며, 러시아 민족주의 행진에 참여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개인적으로 정권에 맞서 싸운 사람으로서 그가 안타깝지만, 그가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은 과거의 비도덕적인 행동 때문에 정치인으로서는 지지할 수 없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고, 면접 직후 바로 채용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으로 날아갔습니다.
An Alien Planet
하르프에서 저는 현지 사람들과 알게 되었고, 곧바로 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북극 원주민 중 한 민족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무시당하는지, 어디에도 초대받지 못하고 민요를 부르는 축제 프로그램에도 결코 끼지 못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제 마음을 깊이 울렸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작업을 시작했고, 지역 문화센터 운영진에게 그들을 프로그램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운영진은 국민 통합의 날 프로그램에 그들을 넣는 데 동의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그때 팀 안에는 제가 몰랐던 내부 갈등이 있었습니다. 새 운영진은 제가 친하게 지내던 기존 직원들을 내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운영진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동료 중 한 명의 남편이 저를 찾아와 이상하리만큼 오래 머물며 사적인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료가 저를 부당하게 대하기 시작했고, 한 번은 리허설 중에 제 학생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그녀는 저에게 “남자답게 굴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그냥 홀을 나왔습니다.
학생들은 저를 격려해 주었고, 저 역시 공연을 앞두고 그들을 정서적으로 지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제가 해고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학생들은 걱정했습니다. 그중 한 학생은 무대에서 무너져 울면서 관객들 바로 앞에서 뛰쳐나갔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저를 걱정하느라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는 감동적인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뒤 관장이 저를 불러 사직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사직서를 썼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충격을 받고 사직서를 철회해 달라고 했지만, 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소식을 듣고 찾아와 저를 안아 주고, 선물을 가져오고, 울며 남아 달라고 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내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떠났습니다…
저는 음악을 그만두고 그저 버티며 살았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집을 구할 수 없었는데, 집주인들의 가장 큰 조건이 세입자가 슬라브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서 아주 먼 곳에 집을 구했고, 더는 모스크바의 학생들과 보컬 코치로 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거나 이해받고 싶은 마음 없이,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줄 프로젝트의 대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 초고들을 열고 영어 노래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Naive (미발표 앨범)
In Love
초안
Bye
Free
버전
Human
I’m Ayal
초안
La La La
Life has no price
Slowly Snowing
Ms. Albino
Only Now
The Broad Way
Is Not The End
초안
제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저는 LGBT 자선단체에 정서적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이해하기 위한 긴 내면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300여 년 전에 제 고향 공화국을 점령하고 그 모든 자원과 사람들을 파괴해 온 나라가, 그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싶었던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것입니다.
저는 벼랑 끝에 있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떠났지만, 이번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정권에 우호적인 한 나라에서 저는 가까스로 스튜디오 앨범을 마무리할 힘을 냈습니다. 처음에 원했던 소리는 아니었고, 절망과 막막함 속에서 삶에 의미를 주는 것으로 돌아오는 그 상태를 담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미발표 앨범 “Naive”를 다시 작업해 그 수록곡 몇 곡을 마지막 앨범 “I AM”에 넣기로 했습니다.
I AM (앨범)
Hey Earthling
The Terra
Bye
Mr. Albino
The Walls
Letter to the Queen
See Me
I Am
It's not the end
Human
버전
The Billion Colours
초안
그 뒤 저에 관한 선전 기사가 나왔고, 이웃 나라에서의 은밀한 박해, 소셜 미디어에서의 대대적인 혐오와 괴롭힘이 이어졌습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안전한 곳으로 가려는 필사적인 시도. 다정한 사람들과의 만남,
비행기,
런던… 그리고 다시 나를 찾아갈 수 있는 기회.
저는 운 좋게도 런던의 독립 연극 “The Guest”에서 연출가 루시 리처드슨, 그리고 그녀의 팀 전체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솔로 프로젝트를 작업하며 다시 나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지지하고, 영감을 주며, 예전처럼 나를 심판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더 이상 고통받고 싶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삶을 멈추고 싶지도 않습니다. 나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이해받거나 받아들여지려 애쓰고 싶지 않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며 계속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예전에는 나를 알아가고, 질문을 던지고, 일어난 일을 돌아보며 결론을 내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자유와 정의가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저에게 다른 행성에 착륙한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전처럼, 저는 어려움과 도전과 위험을 봅니다.
저는 사랑과 큰 희망, 그리고 깊은 믿음을 가지고 앞을 바라봅니다. 누구도 태어난 문화, 출신 국가, 나이, 타고난 성별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인간이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존재입니다. 우리는 누가 될지뿐 아니라 어떤 문화에 속할지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가능하며, 이 세상이 우정과 관용과 상호 존중이 자리한 훨씬 더 안전하고 포용적인 곳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 삶의 경험과 내면의 나침반에 기대어, 저는 마침내 항상 저를 따라다녔지만 한 번도 답할 기회가 없었던 가장 중요한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질문은 간단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이 여전히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나요?
저는 그 답을 제 선언문에 담았습니다.